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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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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내게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여행은 기분전환, 아름다운 풍경, 휴식, 그리고 견문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여행은 내게 삶 그 자체다. 대단한 여행가여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보다 훨씬 더 많은 이사를 다녀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어디를 가나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구경하는 일보다 삶이 더 중요했다. 남들의 기이한 삶, 뜻있는 삶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여기서 나는 살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도 내 동생과 조카들과 친척들이 살고 있는 고향이나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나 파리, 혹은 인도의 봄베이나 케냐의 나이로비, 그 어디에 가든 거기에는 나의 현재의 삶이 따라와 있다. 나는 그것을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 삶이 있어야 비로소 남의 삶, 남의 풍경이 내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나의 삶이 남의 삶이나 공간을 만나는 감촉이며 공명(共鳴)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것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 거기에 가보면 모든 것이 전과 똑같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뭔가 변해 있다. 나는 생각한다. 여기 이 언덕에 그 여름날 나는 서 있었지. 그때 나는 그 풍경 속에 다시 돌아와 있는, 이미 청년이 아닌 나를 생각한다. 나도 변했다. 단순히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많은 관계와 의미의 변화를 이끌고 나는 그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변화와 공간의 접촉, 즉 내게 구체적인 삶의 살과 그 변화를 만지고 있다는 실감, 그것이 여행이다.
2.
여행의 참맛은 무엇보다도 '낯섦'에 있다. 늘 보던 집, 늘 다니던 길, 늘 만나던 사람들, 친근한 생활, 몸에 익은 습관, 눈에 익은 공간, 이 모든 것들로부터 문득 떠나 낯설고 물 선 고장, 처음 보는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우리는 떠난다. (중략)
여행의 참맛은 낯섦 못지않게 '고독함'에 있다. 마음에 맞는 친구, 사랑하는 여인, 혹은 먼발치에서 관심을 가졌으나 기회가 없어 사귀지 못했던 사람들과 같이 떠나는 여행도 물론 흥겹거나 아름답거나 유익하다. 그러나 역시 다른 그 무엇을 통해서도 맛보지 못할 고독을 혼자 떠나는 여행은 비밀처럼 마련해두고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고독은 다름아닌 자신과의 대면이다. 우리는 깊은 사색이나 수련을 거치지 않고도 돌연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옮겨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저 손쉬운 버스를 타고 그저 대단할 것 없는 어느 중도시에 당도하기만 해도 우리는 돌연 잊었던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이 대면은 벌거벗은 삶과의 만남이다. (중략)
어쩌면 여행의 진정한 맛은 이별 연습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은 머무름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풍경도 지나가고 사람도 지나간다. 여행을 통하여 우리들은 이별 연습을 한다.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런 유행가를 부르면 길 위에 선 님이 보인다. 이별의 수만큼 그리움의 수도 늘어간다. 저 푸른 산이 이만큼 다가왔는가 하면 어느새 그 옆모습이 보이고 또 어느새 저만큼 뒤에서 나를 전송하고 있다. 그리고 또 새로운 길과 낯선 도시. (중략)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의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있어야 하네." 여행길에 선 떠돌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쉬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라고 여행자는 가르쳐준다. 생명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리고 모든 것은 이별이기에…… 생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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