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k

최민석, 『쿨한 여자』 본문

THINKING/책, 글

최민석, 『쿨한 여자』

pencilk 2013. 7. 15. 23:24
쿨한 여자
국내도서
저자 : 최민석
출판 : 다산책방 2013.06.30
상세보기

 

1.
우리의 이별에는 뭔가 정확히 매듭짓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묶어버리거나 아예 풀어버리거나 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러지 못한 채 3년이 지났고, 그사이 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실체를 서로 외로웠다고 표현하기로 했다. 언어란 이렇게 항상 카탈로그에 존재하는 옷과 같다. 실제로 입어보면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색상이 약간 다르거나 해서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없다. ㅡp.6



2.
어쩌면 그때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그녀와의 재회가 아니라, 그래서 그녀와의 또 다시 펼쳐질 미래가 아니라, 그리움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리움의 감정 자체를 불러일으켜 세워 내가 가장 나다웠던 시절과 재회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는 나 자신이었던 걸까.

결국 나라는 한 인간은 의식의 존재이고, 지금의 나란 존재는 내가 지녀온 의식들의 집합체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기억에 의존할 것이다. 지금 내게 그녀를 사랑할 때의 감정은 소생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녀를 사랑했다는 기억뿐이다. 나는 그 기억에 압도돼 있다. 따라서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의 기억이다. 이렇게 나의 의식에 수차례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수사에 끝내 설득 당하지 못했다. ㅡp.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