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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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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pencilk 2014. 2. 26. 21:50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국내도서
저자 : 정여울
출판 : 홍익출판사 201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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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후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일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 바깥을 꿈꾸지 못하는 내 자신의 닫힌 마음 때문임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에 대해 완벽한 주인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라는 자리가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내 삶'이라는 이름의 열쇠나 지갑을 누군가에게 맡겨두고 잠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여행은 우리를 잠깐 그 피곤한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내 삶의 자발적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은밀한 기쁨의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 p.145



2.
폐허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모든 곳이 있었던 한때를 조용히 반주하는 곳이다. 폐허는 사라진 것들의 허무를 생각하는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한때는 빛났다는 것, 지금은 빛나는 것들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임을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성찰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누구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서툴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폐허의 아름다움이자 폐허의 미학이다.  - p.160



3.
일상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는 아주 작은 변화도 소중한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동유럽에는 성인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새 언어를 배울 때 생겨나는 에너지를 인생의 권태기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에너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저는 학생입니다"라는 간단한 외국어 문장을 발음하면서 진짜 학생이 된 듯한 느낌을 가져볼 수도 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낯선 외국어 학원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외국어를 어색하게 발음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에너지가 방출된다. 마치 진짜로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학생으로 돌아간 느낌, 사랑 따위는 오래 전에 잊어버린 내가 마치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도 낯선 공간을 탐험하는 마음의 제련법인 셈이다. 늘 익숙한 길이 아니라 매일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는 여행 또한 바로 그런 '영혼의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이 아닐까.  - p.189





+
언젠가부터 TV에 나오는 대한항공의 '내가 사랑한 유럽' 광고 시리즈를 볼 때마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10위부터 2위까지의 순위를 정신없이 눈으로 쫓느라 바빴고, 한달쯤 머물고 싶은 유럽 TOP 10 중 1위로 이탈라아 친퀘테레가 나왔을 때는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말리다 말고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나머지 순위들도 보고 싶어서 유투브에서 무려 광고를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가보지 못한 곳이 나오면 가보고 싶어서 설렜고 한번이라도 가봤던 곳이 나오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중에는 광고 BGM만 들어도 심장이 뛸 정도였다.

이 책은 사실 내용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큰 기대 없이 샀던 책이다. 단지 대한항공에서 사진을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15초라는 짧은 광고 시간 안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행지들을 한 데 모아서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값어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작가 이름만 보고 굉장히 어릴 거라고 생각했다.ㅋㅋ 요즘 별 내공 없이 여행 몇 번 다니고 내가 발로 찍어도 저거보단 잘 찍겠다 싶은 퀄리티 한참 떨어지는 사진들로 가득 채워서 개나소나 여행 에세이 책들을 하도 많이들 내셔서 그런 프리랜서 여행 작가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달까. 책 첫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읽다 보니 글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내공마저 느껴지는 구절이 있어 책날개의 작가 프로필을 뒤져봤다. 작가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처음에 의심했던 그저 그런 넘쳐나는 프리랜서 여행 작가는 아니란 걸 깨닫고 반성함. ㅋ 박정석이나 정수복, 김화영 교수만큼의 내공은 아닐지라도(책 컨셉이 유럽 전체를 아우르며 TOP 10 순위를 매기고 각 도시 및 항목에 대해 짧게 짧게 소개하는 컨셉이라 내공이 드러나기도 힘든 구조이긴 했다) 김영주 작가의 머무는 여행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여행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