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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본문

THINKING/책, 글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pencilk 2014. 3. 3. 22:09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국내도서
저자 : 김연수
출판 : 문학동네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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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미경이 진짜 닥터 강을 늑대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고는 여동생의 과학 상식이 그토록 부족하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그런 과거가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열 살 언저리에는 레테의 강처럼 망각의 심연이 존재하는 것인지, 나중에 미경은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도, 늑대인간의 정체를 폭로할 방법을 연구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장막 저편으로 숨어들었을 뿐,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p.100

 

2.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마취도 하지 않고 이를 뽑았는데도 아프다고 소리치기는커녕 이마를 찌푸리지도 않았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너무 고통이 크기 때문인가요? 그녀가 순진하게 묻자, 의사는 '그건 멀쩡한 이가 아니라는 증거지'라고 말했다. 뽑고 보니 그 이는 뿌리부터 썩어 있었어. 그러니까 하나도 안 아팠던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쓴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나의 연애 전체가 거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가 거대한 환상이었다면 그 연애의 종말이 낳은 고통 역시 거대한 환상일 수 있었다.

 

 

+
회사 일에 치여서 야근 작렬인 생활 중이다 보니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야 내 방 침대에 쓰러지면 소설책보다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인 여름휴가를 위한 스페인 여행 책들에 손이 먼저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그 중에서는 현재로서는 거의 1위에 가까운) 김연수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읽은 책이다. 반쯤 읽고 한참을 손도 못 대고 살다가 이틀 바짝 몰아 읽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읽었다고는 해도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 소설집이기 때문에 기간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도 별로 기억에 남는 단편이 없다. 내가 너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책들에는 밑줄 긋는 문장도 항상 많은 편인데 이번에 겨우 2개가 다인 것만 봐도. 시간 될 때 다시 처음부터 차분히 읽어봐야지, 는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일까. (그러고 보니 놀랍게도 나는 아직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2/3 지점에서 멈춘 지 너무 오래 돼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김연수가 그 작품 이후로 너무 착실히 책을 계속 내주셔서 그 책들 읽느라 ㅋㅋ 일단 그 책부터 읽고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듯. 하지만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는데 그건 언제 다...)

뭐 아무튼. 일단은 일독은 끝냈으니 다음에 여유 될 때 다시 읽는 걸로 하고, 나는 다시 스페인 여행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