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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여행할 권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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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여행할 권리』

pencilk 2014. 4. 11. 00:57
여행할 권리
국내도서
저자 : 김연수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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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친해진 나는 그에게 명함을 주면서 내가 사는 곳은 한국어로는 일산(一山)이니 일본어로는 '이찌야마'인데, 그걸 독일어로 바꾸면 '아인베르크'가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길가다가 만난 일본인에게 어찌 그런 너스레를 떨 수 있었겠느냐마는 그게 다 외로움 때문이었다. 외로움은 맷돼지처럼 힘이 세다. 꼼짝 못한다.

 

2.
후사꼬 할머니는 버클리는 참으로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날씨도 좋고, 자유롭고, 여유로운 곳. 내게 버클리에 살면서 글을 쓰라고 권유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주 긍정하는 말은 아니고 적당히 맞장구치는 말을 했더니 후사꼬 할머니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건 너에게 달린 문제다. 네가 여기서 살고 싶다면 너는 여기서 살 수 있다."

"아니, 비자문제도 있고."

내 말에 후사꼬 할머니는 눈가의 주름이 보이도록 웃으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했다.

"지금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도 한때는 모두 불법체류자들이었어.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살고 싶다면 너는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버클리에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알아내면 된다. 그다음에는 그냥 살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3.
한때 그런 시절들이 있었다. 그래서 강용흘과 이미륵의 만남을 다루면서도 그들이 임시정부와 조선의 독립에 대해 밤을 새우며 울분을 토했다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4.
역전의 가게에서 자란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들이었다. 가게는 서향이었다. 오후가 되면 빛의 각도는 날카로워졌으므로 어머니는 두 손으로 쇠 손잡이를 잡고 힘겹게 자양을 드리웠다. 그러면 오랫동안 그늘이 떠나지 않았으므로 가게 안은 평화로웠다. 나는 즐겨 가게 앞에 앉아서 저무는 태양을 바라봤다. 태양이 저무는 모습은 어느 때고 장엄했다. 구름들은 덧없이 흩어졌다. 유년시절에 오랫동안 그 구름들을 바라봤으므로 나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이제쯤 말할 수 있다.

(중략)

하지만 졸업반이 된 모든 고등학생들은 모두 타지사람을 꿈꿨다.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꿈은 늘 새롭다. 질서정연하게 역을 거쳐가는 기차들의 행렬은 불순했다. 그건 언제나 아이들을 유혹했다. 서울, 수원, 천안 혹은 대구, 마산, 부산 같은 곳의 삶이 거기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최종적인 꿈은 그런 지명이 찍힌 기차표였다. 그 꿈은 자주 이뤄졌다. 그러므로 역에서 나는 늘 삼십도 정도 위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건 가게 앞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덧없는 것들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히 스쳐갈 뿐인 것들만이.

 

5.
공항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같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내가 망명에 성공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여권에 나와 있는 그 생물학적인 존재, 단독자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내게는 이름과 설명과 나이와 국적만이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다른 존재다. 공항에서 비행기표와 여권만 들고 출국심사대를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다른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참으로 감미롭다. 그런 점에서 공항은 환각의 극장이며 착각의 궁전이다. 그리하여 공항은 마침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 셈이다. 맞다. 덧없이 반복적으로 스쳐가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출국심사대에서 이제 드디어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그리하여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면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료들이다. 그들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일깨워준다. 그들은 여행자를 찾는 순간,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가족을 보며 화를 내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완전한 타지사람이었고 여행자였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항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