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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aily Life

시간과 생각

pencilk 2003. 3. 30. 01:47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듯한 요즘이다. 아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틀린 것 같다.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 그야말로 멍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해야 할까.

사실 요즘의 나는 22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시간 낭비를 안 하며 살고 있다. 하루 중에 버리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학원으로, 또는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와 거리를 걸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신문을 읽고, 책을 읽는다. 학원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청강도 불가피한 사정 (yayoi kusama 전시회와 고다르의 '네멋대로해라' 상영 시간과 겹쳐서)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결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즉, 가기 싫어서 안 간 적은 없다는 소리다. 컴퓨터 학원과 일어학원에서도 딴 생각을 하며 수업을 안 들은 적은 한 번도 없고, 동아리 회의에 신문 모니터를 안 해간 적도 없다. (이번 달에 맡은 신문이 조선일보라 워낙에 스펙터클해서 안 해갈래야 안 해갈 수 없기도 했다.)

사실, 요즘의 내 모습은 내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나는 정말 의지에 비해 실천이 부족한 인간이라 생각해왔는데, 그리고 언제나 시간 낭비를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요즘의 내 모습은 정말 놀라울 정도다. 방학 내내 새벽 5-6시에 자고 오후에 일어나는 폐인 생활을 하면서, 휴학하면 1년 내내 이렇게 폐인 생활 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

역시 나는 무언가 정해진 것이 있으면 잘 따라가는 스타일이다. 내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 모습이지 않은가. 학원을 2개 다니는 것과 청강을 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매일 일정한 시간-이라는 규칙을 주었고, 혼자서 하루에 영어 단어 몇 개 외우기, 일어 공부하기 등의 계획을 세우는 것에 비해서 학원에 가기-라는 무언가에 틀 지워지는 순간, 나는 놀랍도록 부지런해진다.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고 있고, (3월 내내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났다) 31일부터는 아르바이트도 시작한다. 그리고 학원 시간도 30분 당겨져서 이제 매일 7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다. 나름대로 정말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도 끊임 없이 부족하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하는데... 그렇게 쌓여간다. 아직도 못 한 것이 너무 많다. 시간이 없다-라는 표현을 이전의 나라면 '놀면서 괜히 시간 핑계 대냐'라는 생각에 절대 쓰지 않겠지만, 요즘의 나는 정말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정말로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무지한 것이고 내가 욕심이 많은 것이다.

해야 할 일, 하고싶은 일은 끝이 없다. 커다란 일부터 아주 사소한 일까지. 생각은 끝이 없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시간과 몸은 부족하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늘 무언가에 쫓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것. 이른 아침 컴퓨터 학원이 끝나고 일어 학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이어폰을 꽂고 이대 앞에서 종로까지 가는 길을 바라본다. 커다란 빌딩들, 신문사 건물들이 스쳐지나간다. 광화문을 스쳐지나갈 때면 꼭 광화문을 쳐다본다. (사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한강을 지나갈 때에 비해 광화문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어떤 친구의 글을 읽고 어느 순간부터 나도 광화문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걷는다.
나는 매일 꽤 많은 거리를 걷는다.
걸으면서까지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지는 않는다. 그 때는 이어폰을 꽂고 그냥 걷는다. 가끔은 디카를 들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 별 것 아닌 것들에서 나는 여유로움을 느낀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우려했던 것보다 지금 나의 생활은 꽤나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4월은 더욱더 바빠질 거라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도 3월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것.

5월 초 컴활 필기 시험을 고비로, 5월 4일이 지나고 나면 기필코 이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주말에는 기차를 탈 거다. (사실 이것도 얼마나 실천에 옮길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이 계획이 성립되려면, 나는 주말에 만날 친구가 하나도 없어야 하고, 돈도 많아야 한다.;)


친구들도 모두 바쁘다.
3학년. 각자의 앞을 향해 걸어나가느라고 힘겨워 하고 숨차 하면서도 웃으면서, 모두들 열심히 걷고 있다. 한 때는 두려웠었다. 겁이 났었다. 이제 모두 각자 걸어나가는구나.  우리는 또 이렇게 헤어지겠지?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길들여졌던 나는, 또 외로움에 치를 떨어야 할 지도 몰라.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그 때처럼. -물론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다들 멀어져 버리는 건가 싶어서. 이렇게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그리고 그냥 그 애랑 친했던 적도 있었지- 그렇게 되어버릴까봐. 언젠가부터 늘 해왔던 걱정. 나는 언제나 그 걱정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은 것 같다.
이유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 동안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표현하기 힘들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시간이 흘렀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불안해하고 언젠가 모두 떠나버릴 사람들이라는 생각 속에 갇혀있던 이전의 내가, 이제는, 오랜만에 연락해도 늘 만나온 것 같은 사람들을 몇 명 만들었다는 것 정도의 변화.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지독하게 행복할 것이지만 한 명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던 과거의 나는 조금은 희미해져 갔다. 물론 다 사라졌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올 한해는 내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해가 될 것이다. 2년을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녔던 그 때의 내 모습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은 벗어난 것 같다. 그 일이 있기 전의 내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봤다. 하지만 물론 그 때와는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 시간이 흐르기 전으로 똑같이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제서야 비로소.
언젠가 정말로 그러고 싶다는 바램-에서 가슴을 후벼팠던 노래 가사가, 이제 공감-으로 가슴을 후벼판다. 기뻐해야 하는 걸까.

지금의 나는, 과도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과도기는,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안녕 이제는 안녕 절실했던 기억과 나날들 모두 지워져, 사라졌네 내게 남은 전하지 못한 가슴 속 얘기는 의미없는 혼자만의 초라한 변명 한없이 우스워지네 안녕 이제는 안녕 지겹도록 뒤척인 수많은 밤들 몸짓들, 기다림들 나를 위해 스스로 만든 지독한 상처는 용기 없는 혼자만의 안스런 위안 한없이 가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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