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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본문
역시 책과 영화는 각각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책을 영화화한 것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나에게는 냉정과 열정 사이도 그랬다. 아마도 책을 보고서 각자 감동을 받는 부분이 다르고 각자가 상상한 것들이 다르기 때문일 거다.
나는 본의 아니게 블루와 로소를 연이어 보지 못하고 블루를 읽고 한참 후에 로소를 읽었다. 일단은 영화 주인공들이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너무 안 맞았다. 특히 아오이와 마빈. 내가 상상했던 아오이는 훨씬 더 메마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고 좀 더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오히려 준세이 쪽은 약간은 아저씨틱한 모습으로 상상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영화에서 다케노우치 유타카는 내가 상상했던 준세이보다 너무 멋있었다.
나는 블루보다는 로소가 더 와닿았었다. 스토리로만 치면 블루가 스토리도 많고 감정 표현도 더 많아서 재밌는 반면 로소는 지겹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그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블루에서 준세이는 줄곧 아오이를 드러내 그리워하고 (사람들에게 드러낸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즉 책에 나오는 서술에서는 계속 아오이를 드러내놓고 그리워한다.) 복화사로 일하면서 그림이 찢어지는 사건이 생기는 등 더 볼거리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로소에서, 전혀 예전을 떠올리지 않는 듯,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듯,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고 있는 아오이의 일상 속에서 문득, 아주 조금씩 준세이에 대한 기억이, 그리움이 치고 올라오던 그 느낌이 좋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냉정하게 잘 살던 아오이가, 편지 한 장에, 전화 한 통에 흔들려버리고, 그제서야 나는 준세이를 사랑했다-라고 고백하는. (로소에서 아오이는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서야 준세이에 대해 드러내고 그리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그런 아오이의 캐릭터는 전혀 살지 않았다. 목욕을 자주 하는 것에도 분명 책에서는 아오이의 그런, 겉으로는 마브를 사랑하는 것 같고 아무 문제 없어보이지만 사실 속은 메말라버린 그런 냉정함을 잘 드러내주는 하나의 매개였는데, 영화에서는 그저 책에서 아오이가 목욕을 좋아하니까 이런 장면을 넣어야 한다-라는 듯 그렇게 한 두번 짧게 나올 뿐이었다.
그 외에도 많다. 책에서는 마지막까지 전화 통화, 편지 정도가 그만이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계속 스쳐지나가는 두 사람이 마지막에 드디어 만나면서 절정을 이루는데, 영화에서는 어이 없게도 거의 영화가 시작하자말자 두 사람은 만난다. 그래서 피렌체의 두오모의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오모에서의 재회 씬은 책에서 읽었을 때보다도 훨씬 덜 감동적이었다.
마빈 캐릭터도 그렇다. 책에서 마빈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사랑하는 척 살아가는 아오이를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는, 그 누구보다도 아오이를 사랑하는 남자다.(그리고 잘 생긴 서양 남자다;) 너무 멋있는 사람이어서, 나는 아오이가 마빈에게, LA로 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영화 속의 마빈은 뜬금없이 질투하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그저 그런 남자일 뿐이었다. 그것도 너무 안타까웠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다. 특히나 아오이의 캐릭터에 애정이 많았던 나에게는 더더욱. 책의 스토리와 책 속의 아오이, 영화 속의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영화 음악, 그리고 두오모의 영상, 그렇게 합치면 가장 멋있는 영화가 머릿속으로 그려질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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