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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십사]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본문

WRITING/YES24

[책방이십사]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pencilk 2007. 9. 2. 00:34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저
문학과지성사 | 2007년 07월

요즘 여성들 중에 정이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위악적 도시여성들의 모습에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의 감정을 느끼며 정이현에 열광했던 여성들에게, 신작 『오늘의 거짓말』은 바로 지금 현재의, 또는 미래의 어느 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다가옵니다.


정이현 작가의 글을 읽다가 줄을 긋게 되는 문장들은 대단히 감동적이라거나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해주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맞아, 나도 이랬었어' 혹은 '나도 이런 생각 많이 했었는데' 하고 공감하게 되는 문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거짓말』은 여성 화자들만 등장했던 이전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나 『달콤한 나의 도시』와 달리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단편들도 있는데요. 이상하게도 제가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남성 화자의 이야기였답니다.


어떤 경우든 메뉴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은 일회성이다. 다음번 식탁을 예비하여 냉장고에 보관해둔 음식은 거의 언제나 잊혀진다. 구청에서 음식물 분리수거를 철저히 단속하게 된 뒤부터, 그리고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을 버리는 바람에 수세식 변기가 막히는 사건을 겪은 뒤부터는 허출한 밤 야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일도 그만두었다. 어머니가 싸준 갓김치나 열무김치 같은 것들은 불투명한 밀폐 용기에 담긴 채 마냥 방치되기 일수다. 육 개월이나 일 년, 아무튼 일정한 시기가 넘으면 뚜껑을 여는 일 자체가 공포스러운 그런 순간이 온다. 그런 때가 오면 새벽을 틈타 밀폐 용기에 내다 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 본문 중에서


자취생 7년 차인 저에게 어찌나 공감 가는 문장이던지요. 일정한 시기가 지난 반찬통 뚜껑을 여는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웃음)


그 밖에도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는 주인공이나,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주인공을 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외국에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지 않습니까. 저 역시 대학교 1, 2학년 때만 해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 때가 좋을 때다'라는 선배님들의 조언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딱히 꼭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의식 따위 없이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곤 했었드랬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평온한 일상이 깨어지려 할 때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평온을 지키려고 하는, 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마는 인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의 거짓말』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거짓말을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남편이나 연인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서, 인터넷 쇼핑몰에 고객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등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가벼운 거짓말도 있고, 큰 죄가 되는 무거운 거짓말도 있습니다.


세상에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때로는 세상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도 하지요. 선의의 거짓말을 멋드러지게 해낸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도 있고, 너무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에는 거짓말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요?(웃음)


도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같으면서도 또한 한없이 낯선, 일상의 균열로 생긴 틈새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쯤 읽어보세요.
나조차도 잊고 살았던 수많은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YES24 도서팀 블로그 <책방이십사> - '이 책에 꽂히다'
원문 : http://blog.yes24.com/document/724726
(위 글은 YES24 도서팀 블로그 '이 책에 꽂히다'라는 게시판에 올린 글이라 말투가 요렇습니다;)
 

+
1.
일상은 그런대로 평온하다. 어쩌다 가끔, 예컨대 휴일 오후 긴 낮잠에서 깨어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버렸다든가 할 때에는 문득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 고독이야 현대인들 누구나 느낄 만하나 수준이므로 나도 견딜 만한다고 생각한다. 삶에 절정이 없다는 것쯤은 진즉에 눈치 챘다.


2.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 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주말 저녁에는 증권회사 신입사원인 남자 친구와, 실제로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모범적 이성 교제를 위한 데이트 매뉴얼』에 나오는 방식대로 데이트했다. 성실하고 지루한 데이트였다.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3.

엄마 미쳤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쳐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4.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뭘 해? R이 물었다. 그냥 책 읽고 공부도 하고, 그러지. R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넌 안 지겹니. 무슨 공부를 자꾸 해? 미안하지만 지겨울 정도로 공부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양심에 좀 찔렸다.


5.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함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은 다만 내 밥이지. 밥은 하루에 세 번 먹고 거짓말은 하루에 스무 번 정도 하니까, 거짓말은 내 밥일 뿐만 아니라 커피이자 담배이며 맥주이고 또한 교통카드인지도 몰라. 나는 하루에 스무 번 거짓말을 하여 스타벅스의 아이스 모카를 마시고, 마일드 세븐을 사 피우며, 술집에서 친구들 눈치를 보지 않고 국산 맥주보다 이천 원 더 비싼 벨기에산 호가든을 주문하지. 교통카드를 꽉꽉 채워 충전하지만 어떤 날 아침엔 칠 센티미터 구두굽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거든. 그럴 땐 오지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오른팔을 척 올려 택시를 세워. 기본요금 거리의 지하철역 앞에서 택시를 내리는 순간에는 항상 관자놀이가 얼얼해지도록 갈등하지. 회사까지, 그냥 타고 가버릴까, 그럴까, 이대로 쭉.
삼십 여분 남짓 중형차의 뒷좌석을 나 혼자 점유하는 대가는 만 원 가까운 현금과 교환될 거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택시의 뒷문을 소리 나게 닫고 지하철 역사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내가 느끼는 뿌듯함에 대해 당신은 알까? 내 힘으로 내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그 자부심을 말이야.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왜 내게 건네준 패는 옐로카드밖에 없는 걸까 궁금해 하던 시절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나를 벌어 먹이는 사람이 되었고, 적어도 그건 내일과 모레도 어제와 오늘처럼 반복되리라는 공포를 견디는 것만큼이나 경이로운 일이잖아. 안 그래? 그 정도면 족하다고 나는 생각해왔어.


6.

유행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유행보다 더디게 지나간다. 채린과 나는 얼마나 더 이곳을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녀에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