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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십사] 윤성희, 『감기』 본문

WRITING/YES24

[책방이십사] 윤성희, 『감기』

pencilk 2007. 10. 14. 23:39

감기

윤성희 저
창비 | 2007년 06월

윤성희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뭐랄까. 낯설다? 그래. 낯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띄어쓰기가 없다든가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다든가 하는 도발적이고 파괴적인 문장의 해체나 기발한 상상력, 특이한 소재, 뭐 그런 것을 뜻하는 건 아니다. 아마도 윤성희의 글쓰기 방식에, 윤성희 식 유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윤성희의 소설은 암호 같다. 문장은 쉼 없이 달려가고, 그 문장을 따라 함께 정신 없이 달리다 보면 이야기는 금세 끝나버리고 머리는 멍해진다. 머리와 가슴이 그녀의 글을 채 다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달리기를 멈추고 결말이 났지만, 그 이야기를 읽고 있던 머리와 가슴은 아직도 혼자 달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야기의 암호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달려나가려는 가슴을 멈춰 세우고 잠시 숨을 골라야 한다. 그래서 윤성희의 글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암호를 해독하듯이 그렇게 천천히 읽는 편이 좋다.

낯섦의 이유는, 읽는 이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녀의 유머에도 있다. 윤성희의 유머는 유머 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하다. 또한 별 생각 없이 읽다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만큼, 그녀의 유머는 뜬금없고 뻔뻔하다.

<구멍>에서 나의 부모님은 결혼한 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어머니는 동남아 여행까지 가서 집에 남아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드라마 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아버지는 갑자기 어머니로부터 전화기를 빼앗아 든다.

"거기 몇시냐?" 나는 대답했다. "이제 막 드라마가 끝났어요." 전화기 저편에서 희미한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버지는 잘 있으라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복권 사는 걸 잊었어."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적에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정리했던 가방을 뒤져 혈압약을 꺼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을 억지로 벌려 약을 먹였다.

『감기』의 주인공들은 결코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사는 인물들이 아니다. 삶의 곳곳에서 넘어지기 일쑤고 남들이 보기에 평범의 수준도 안 될 법한 시시한 삶을 산다. 하지만 그들은 삶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순간에조차 지독하게 담담하다.

"어떻게 됐냐?" 가게세를 받아 먹으며 살 팔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집이 넘어갔어요." 아버지는 오빠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빼앗아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한마디씩 했지만 아버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윤성희의 글을 읽는 동안 몇 번씩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모순되고 대립된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오기 때문이었다. 등장인물들은 절망에 빠졌는가 싶으면 시시껄렁한 농담을 해대며 웃고 있고, 웃고 있는가 싶으면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덩그러니 드러내 보이며 주저앉는다. 그 이질적인 감정의 공존 때문에 그녀의 글은 한없이 낯설다.

그리고 그 낯섦은, 두 번 세 번째 읽을 때쯤에는 끈적끈적한 여운이 되어 가슴 속에 가라앉는다. 지나치게 담백하다 못해 메마르고 버석거리는 문장들 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한 온기야말로, 내가 이 책에 빠진 이유이다.





YES24 도서팀 블로그 <책방이십사> - '이 책에 꽂히다'

원문 : http://blog.yes24.com/document/736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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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 몇시냐?" 나는 대답했다. "이제 막 드라마가 끝났어요." 전화기 저편에서 희미한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버지는 잘 있으라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복권 사는 걸 잊었어."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적에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정리했던 가방을 뒤져 혈압약을 꺼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을 억지로 벌려 약을 먹였다.


2.

"어떻게 됐냐?" 가게세를 받아 먹으며 살 팔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집이 넘어갔어요." 아버지는 오빠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빼앗아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한마디씩 했지만 아버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3.

한은 다짜고짜 할아버지의 신을 벗겼다. 고무신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할아버지에게 양말을 벗어보라고 했다. 발냄새가 움막 안에 가득 퍼졌다. 어찌나 고약했는지, 한구석에서 졸고 있던 고양이가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달려나간 고양이는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4.

해변 입구에는 경고문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음주수영을 하지 맙시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행위를 하지 맙시다. 글을 읽다 말고 오빠가 큭, 하고 웃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더니 ‘선’자의 ㄴ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서정적인 행위를 하지 맙시다.


5.

그녀는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넣고 돌리면서 오층까지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녀는 지난 몇 달 동안 아파트 계단에서 마주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마치 유령들만이 사는 아파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304호의 초인종을 누른 후 재빨리 사층으로 올라갔다.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6.

"그건 그렇고, 인터뷰는 해? 말아?" 그녀의 말에 네 딸들이 동시에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첫째는 생각했다. 그날 자신들이 한 일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고. 둘째는 생각했다. 그런데 휩쓸리다보면 했던 일도 안한 일이 되고 안했던 일도 한 일이 되어버린다고. 셋째는 생각했다. 리플이 무서워. 막내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언니들은 항상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척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했을 뿐. 딸들의 엄마인 그녀가 박수를 세 번 쳤다. "그만 생각하고 이제 의견을 말해봐. 막내부터." 막내가 언니들을 둘러보았다. 학교 다닐 적에도 발표 따윈 해본 적이 없었다. "해요. 그 덕에 장사가 잘될지도 모르잖아." 막내의 한마디에 언니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접었다.


7.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할머니는 피가 눈으로 들어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때 둘째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난 곧 죽을 것 같아. 둘째가 할머니의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아들인 것 같아요? 딸인 것 같아요? 할머니는 아들일까, 딸일까,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