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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리뷰] 김애란, 『침이 고인다』 본문
침이 고이듯 서서히 마음 속 한구석에 고이는 글
| --- 정현경 (pencil@yes24.com)
'김애란' 하면 늘 따라붙는 수식어에는 '1980년대 소설가의 대표주자', '무서운 아이' 등이 있다. 1980년생이라는 그녀의 나이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나 역시 『달려라 아비』로 처음 김애란의 글을 접했을 때 그녀의 출생년도를 알고 묘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리 톡톡 튀는 글을 쏟아내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하는 신세대 작가라 해도 70년대생이 대부분이었는데, 김애란은 나와 같은 80년대생이었다.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와타야 리사의 글에서는 10대라는 그녀의 나이에 걸맞는, 그 나이 또래만이 쓸 수 있는 솔직함과 미숙함, 그리고 섬세함 같은 것을 보았다면, 김애란의 글에서는 20대 다운 '명랑함'과 그 나이 답지 않은 '애잔함'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문단에서 김애란은 '애란이'로 통한다고 한다. 2년 전과 달리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문단의 막내가 아니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그녀는 '문단의 여동생'이다.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의 말처럼, 첫 소설집 발표 후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계절마다 한 편 꼴의 작품을 써내며 사랑 받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 동안 발표한 8편의 단편을 모은 『침이 고인다』는 여전히 '김애란 다운', 하지만 조금 더 진중해진 무게로 다가온다.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들도 그러했지만,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그저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 하지만 현실사회에서 '보통'의 대열에 선다는 것은 놀랍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아침 조금 더 잘까 말까를 고민하며 '정말 피곤하다'를 되뇌면서도, 술자리에서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지인들의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을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아울러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온다.(침이 고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을 갖고 싶"어하고(도도한 생활), 가짜 아디다스 추리닝을 걸치고 모텔이나 여관 창문을 올려다보며 자신에게 방이 있었으면 생각한다.(성탄특선) 그들은 4인용 독서실에서 재수를 하고,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반 지하 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등록금을 벌지만, 그들에게 그 공간들은 자신만의 방이 되지도, 또한 오랫동안 머물 곳이 되지도 못한다. 그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이자, 또 언젠가 다시 '지나가게 될' 곳이다.
재수의 경험이 있고 7년째 자취생활을 하고 있으며, 주위에 신림동 고시원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여럿 둔 나로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참으로 먹먹했다. 슬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유독 불행하거나 슬픈 삶도, 안쓰러워 하며 동정해야 할 삶도 아닌, 그저 내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애란은 이런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명랑하게, 그리고 덤덤하게 풀어낸다. 마치 농담을 건네듯이 툭 던져진 문장들 앞에서 웃음이 나고, 그 웃음 뒤에는 가슴 속 깊은 곳에 무언가가 느릿하게 출렁이는 듯한 느낌이 남는다. 그래서 그녀는 경쾌하고 재미있는 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도, 진중하게 풀어가는 문학을 선호하는 평론가들에게도 사랑 받는다. 그녀가 왜 '문단 여동생'인지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다.
특유의 세상 달관한 듯 삶을 꿰뚫어보는 표현들 앞에서는 언제나 대책 없이 허를 찔리고 만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이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중략)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칼자국)
김애란의 문장은 결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너무 진중하게 흐르지 않기에, 물 흐르듯 쉽게 가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온 문장들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고 침이 고이듯 서서히 마음 속 한구석에 고인다. 문장으로 읽었으되 때로는 촉감으로, 때로는 소리로, 또 때로는 시각적 이미지로 남는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도-도- 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기도 했고, 비 냄새를 맡기도 했으며, 가슴에 칼자국이 나는 듯한 쓰라림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가 그려낸 삶의 모습들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바로 우리네 삶의 모습이었듯, 책을 덮을 때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이 고였다.
YES24 편집자 리뷰
원문 : http://www.yes24.com/24/goods/2697252?CategoryNumber=001001017001001#contentsYes24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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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습이 지루할 때면 각 소리의 표정을 그려봤다. 레는 곁눈질하는 느낌이고, 솔은 까치발 선 인상을 줬다. 미는 시치미를 잘 떼고, 파는 솔보다 낮지만 쾌활한 것 같았다. 나는 다섯 음에 적응해갔다. 피아노는 건반 자체가 아닌 자기 내부의 어떤 것을 ‘때려서’ 음을 만든다는 것도 이해했다. 높은 음일수록 빨리 사라진다는 것도, 음마다 자기 시간을 따로 갖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각 음이 모여 음악이 된다는 건, 여러 개의 시간이 만나 벌어지는 어떤 일일지도 몰랐다.
2.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을 갖고 싶었다.
3.
창밖으로 지상의 길들이 전신주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길은 행인들의 발굽이 닿을 때마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처럼 가볍게 출렁였다. 문득 나의 하늘은 당신의 천장보다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돌아 누우며 언니에게 속삭였다.
“어쩐지 여기, 서울 같지 않아.”
언니가 잠 묻은 말투로 대꾸했다.
“서울 다 이래. 네가 아는 서울이 몇 곳 안 되는 것뿐이야.”
- 도도한 생활
4.
정말 피곤하다. 그녀는 고민한다. 조금만 더 잘 것인가 말 것인가. 조금 더 잔다면 얼마나 잘 것인가. 직장까지 택시로 만 원이니 벌금 낸다 치고 딱 만 원어치만 자면 안 될까. 그냥 지각해버릴까. 당장의 숙면이 2만 원어치의 가치가 있다면, 그러면 자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2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한 번도 지각한 적 없으니 한 번만 지각할까. 그래, 성실함이란 미래의 실수를 위한 달란트 같은 것일지도 몰라. 벌금은 또 다른 의미의 허락이니까.
5.
그녀는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 한 개와 적금을 부어갈 만한 생활력을 갖고 있다. 아울러 만기일까지 적금을 붓기 위해선, 오늘 하루, 열심히 얼룩말처럼 달리고, 곰처럼 춤춰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인생의 어떤 부분을 가불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많지만, 한 1년 묵묵히 공부한 뒤 공기업에 취직하는 후배들을 보며 질투가 날 때도 있지만, 경제적 독립이 주는 떳떳함과 함께 술자리에서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지인들의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녀가 학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울러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다.
6.
박선생님, 감기 걸렸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김선생이 묻는다. 여름에 웬 감기? ‘여름에 웬 감기냐고? 집채만 한 에어컨 바로 옆에 앉아 있으니까 그렇잖아. 내가 늘 바들바들 떠는 거 알면서 아무도 에어컨을 줄이거나 끄자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녀는 갑자기 아이처럼 서러워진다. 일전에 지독한 목감기에 걸렸을 때도 모두 한마디씩 걱정해줬지만, 아무도 보강을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7.
두 사람은 많은 얘길 나눴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가끔 허리를 젖혀 웃었다. 그녀는 달콤하게 취해 비스듬히 몸을 뉘었다. 적어도 좋아하지 않는 직장 동료의 승용차 뒤에 앉아, 도착지까지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아야 했을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유통 기한이 정해진 안전한 우정이 그녀를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몰랐다. 하루란 누구라도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근사해질 수도 친절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 침이 고인다
8.
- 내가 오늘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
그러곤 그 아래 1년치 계획표를 붙여놓았다. 나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주먹을 쥔 채 창밖을 바라보려 했으나ㅡ 주위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밤, 작년에 수능 만점 맞은 아이의 수기를 읽었다. 나는 ‘열심히 하자!’라는 각오로 이불을 편 뒤 누웠지만ㅡ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9.
“우리 대학 가서도 연락하자.”
저편 어딘가 연인의 어깨에 기대 ‘미친년’처럼 웃어대는 여자가 보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식이가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재수 생활에서 나한테 남는 건 너뿐인 것 같아.”
민식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가 대학 가서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량진은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K-59. 오래전 내 책상 번호.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 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가 내겐 어떤 떳떳한 한 시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만큼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때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ㅡ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 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 자오선을 지나갈 때
10.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중략)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 칼자국
11.
그때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하루 두 번 한강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의자에 기대 있거나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을 한, 60년대 한국 작가들의 글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열차가 전속력을 다해 한강을 지나는 찰나, 창문 안으로 20세기 풍경이 박살 나나 채 쏟아지는 순간이 올 때면 재빨리 몸을 틀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다리 아래서 고요하게 빛나던 강…….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뜨거운 차를 마셨을 때와 같이 정갈한 고독이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과 함께, 내가 떠나온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것들이 그렇듯, 그것은 늘 금방 지나갔다.
- 네모난 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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