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비교 분석
-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성 안에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Ⅰ.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은 학생운동, 여성운동, 제3세계 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해체, 후기 구조주의의 사상으로 시작되었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허구성을 지적함으로써 세상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모든 이분법적 사고체계를 거부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가상의 세계 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고급 문화를 거부하고 키치를 예술로 끌어올려 표면적으로 가벼움을 지향한다. 끊임없이 해체시키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하다. 가벼움과 허무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주요 화두다.
1980년대에 발표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는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주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두 작품 속에 들어있는 사회 상황이나 시대 배경은 동양과 서양을 뛰어넘어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가벼움과 허무주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문체, 그 세세한 내용에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이처럼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중심에 서있는 두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포스트모던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가벼움과 허무주의가 두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비교해보고, 서술방식,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등에서 이 작품들의 기본 바탕인 포스트모더니즘 외의 문예사조적 성격들도 찾아본다.
Ⅱ. 본론
1) 서술형식
두 작품은 먼저 서술 형식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작가가 글 속에 개입하고 직접 등장함으로써 ‘이것은 소설’임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작품 속에 글이 창작되는 과정까지 드러난다. 밀란 쿤데라는 스스로 글 속에 개입하여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등장인물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서술하는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면서 마치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자신은 그저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을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각 인물의 심리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며 같은 사건이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이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저자의 의미가 상실된 포스트모던적 서술 방법이다.
반면 <상실의 시대>는 리얼리즘 기법으로 서술되어 있다.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쓸 때, 내용보다 문체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한다. <상실의 시대>의 문체는 가볍고 속도감이 있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의 심리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감정에 대한 격렬한 폭발이나 과장도, 사물에 대한 격정적 심리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사물을 관조하듯 그렇게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적 문체는 주인공의 시선이 세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시•공간적 배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상실의 시대>는 각각 1984년과 1987년에 발표되었다. 두 작품은 발표 시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적 성격이나 사회적 상황도 굉장히 비슷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가 체코를 점령한 1960년대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은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이다. 일명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이 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불법 무력 침공을 강행하였고, 개혁파 주도자들은 대규모 숙청되었다. 당시에는 체코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나라들에서도 혁명과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1960, 70년대의 유럽의 사회적 시련이 이 작품 내부에 깔려있다.
<상실의 시대>의 배경 역시 혼란스러운 시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1960, 70년대의 일본 사회는 모든 것이 변동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정치적인 투쟁과 탄압이 있었고, 히피와 마리화나와 비스마르크의 반전가가 있었다. 가치관은 반전되고 또 반전되었으며 진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러한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두 작품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작품 모두 무국적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분명 체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체코는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신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상실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배경은 일본의 도쿄이지만, 이 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 속의 사회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무국적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밀란 쿤데라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각각 체코와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 이 작품들을 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그런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글을 쓴 목적에서, 보다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추상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즉 일본이라는 구체적 어떤 사회를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추상적인 사회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 작품 속의 체코와 일본은 비단 체코와 일본이라는 나라만이 아닌, 모든 것이 뒤집히고 요동치고 있는 현대 사회이다. 현대사회는 해체와 전복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막상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리하여 허무와 냉소만이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이다.
3) 등장인물
두 작품의 배경은 1960, 70년대이지만 각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많이 얻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여러가지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진지함보다는 가벼움을 추구하고 사회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면에서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은 어디에도 확실하게 소속되지 않는다. 두 작품에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연결해 비교해본다.
① 배반과 가벼움의 미학 - 사회를 소외시키는 이들
토마스와 와타나베, 사비나와 미도리는 굉장히 다른 듯하면서도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확신도 없고 있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그래서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당연하게 생각되어 온 것을 배반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포트스모던적 인물들이다.
• 토마스와 와타나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스는 ‘삶은 단 한 번 뿐이고 반복되지 않으므로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더없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다.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 역시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자기와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와타나베는 이 두 가지 결심과 함께 새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해 받고 싶다는 생각 없이 미리 체념하고 살아간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그런 식이다.
학생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사회는 요동치지만 사회에 대한 와타나베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와타나베는 데모가 끝나고 나서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했냐며 냉소한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졸업을 위해 열심히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것에 대한 반발심에 자신은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그는 사회와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토마스는 와타나베처럼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사회는 토마스에게 자신이 쓰지 않은 글에 자꾸만 서명을 하라고 강요하고, 토마스는 그를 거부함으로써 사회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결국 그는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외과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로 전락하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한다’라는 묘한 희열을 느낀다.
• 사비나와 미도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사비나와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도 무거움보다는 가벼움 쪽에 손을 드는 인물들이다. 사비나는 학창시절에 피카소를 멀리 하라는 아버지를 배반했고, 미술가가 되어서는 지도자의 얼굴을 그리라는 당의 지침을 배반했다. 배반의 순간은 언제나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하지만 더 이상 배반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의 공허는 그녀를 절대 고독에, 오랫동안 갈망했던 전체적인 가벼움에 이르게 한다.
미도리는 어렸을 때부터 애정과 배려를 받지 못하고 전투적으로 살아와야만 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병든 아버지의 간호와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며 살아왔다. 조그마한 서점 하나를 꾸려나가면서 사는 평범한 집안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다닌 탓에 미도리는 사회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쩌면 <상실의 시대>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스스로 사회를 소외시키며 결코 사회 속에 속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사비나가 사랑하는 ‘배반의 미학’처럼, 그녀 역시 사람들의 기대를 깨는 행동을 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또한 가벼움을 사랑한다.
②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있는 그들
• 테레사와 나오코
테레사와 나오코는 위의 4명의 인물들과는 조금 다른 특성을 지닌다. 그녀들은 가벼움을 추구하고 현실에 대해 회의적인 토마스와 와타나베에게 어떤 이상이나 꿈과 같은 존재이다. 또한 그녀들은 남자 주인공들이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테레사는 6개의 절묘한 우연의 연속으로 토마스의 삶에 뛰어든다. 토마스는 그녀가 ‘마치 어느 누가 까맣게 콜타르를 칠한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버린 아기’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이 아기를 자기 침대의 강둑에서 구조하도록 말이다. 그는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이전과 다름 없이 여전히 다른 수많은 여자들과 sex를 한다. 그에게 sex를 하는 수많은 여자들이 현실이라면 테레사는 언제나 안정감을 주는 이상과도 같다.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는 미도리와 비교되면서 이상으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와타나베에게 미도리가 현실의 여인이라면 나오코는 이상의 여인이다. 또한 나오코는 현실보다 죽은 기즈키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는, 와타나베의 과거의 기억 또는 상처 같은 존재이다. 와타나베는 그녀를 죽음, 과거로부터 현실, 삶으로 끌어내고자 한다.
4) 꿈의 매카니즘과 현실세계
현실과 이상의 모습이 공존하는 꿈의 매카니즘은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두드러진다. 토마스가 다른 여자들과 sex를 하는 것에 대해 테레사는 집착과 질투로 괴로워하는데, 이러한 심리는 그녀의 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꿈 속에서 그녀는 수많은 여자들과 함께 똑같이 움직이기를 강요 당하거나 심지어 죽기도 하는데, 꿈 속에서 그러한 것을 강요하는 자는 언제나 토마스이다. 그녀의 꿈은 언젠가 토마스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 중의 두려움을 드러내는데, 이 극단적 형태의 꿈의 내용들은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더 극적으로 그녀의 심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꿈의 매카니즘은 글의 분위기를 몽환적으로 이끌어간다. 이는 라깡의 꿈과 무의식의 세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실의 시대>에도 현실과 이상의 세계가 공존한다. 나오코의 존재 자체도 그렇지만, 나오코가 살고 있는 외부와 차단된 아미료 요양원은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과 유리된 어떤 이상적 공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상적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부분이 결핍된 사람들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와타나베는 이런 이상적 공간에 있는 나오코를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도리를 만나면서도 와타나베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나오코가 있다. 그녀는 성장의 고통을 치뤄야 할 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기즈키가 그렇게 죽었고 자신은 이렇게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라 말한다.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든 고통의 대가가 필요하다. 그것을 외면해버리고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상으로 느껴지지만, 그 이상은 현실을 이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나오코를 생각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한다. 주인공의 방관적 성격과 허무주의, 몽환적 분위기,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칫 낭만적이게까지 느껴지는 <상실의 시대>는, 사실 리얼리즘적 성격을 짙게 갖고 있다.
5)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허무주의
사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벼움’을 다룬 ‘무거운’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니체의 영원한 회귀 사상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밀란 쿤데라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 작품이 말하는 가벼움은 경박함과는 다르다. 무조건 가벼움을 찬양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무거움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 당해온 키치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 줌’이다. 작가는 토마스를 통해 일회적 사랑이 언제나 부도덕한 것은 아니며, 사비나를 통해 배반이 늘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등장인물들은 오랜 방황의 끝에 인간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들에게는 죽음조차도 그저 허무한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러한 가벼움들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무거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인물들이 겉으로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반면에 내면으로는 ‘인간의 존재’와 같이 굉장히 무거운 고민을 하고 있다면, <상실의 시대>의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겉으로는 더 진지하고 더 고민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인물들보다 오히려 더 가볍다. 나오코가 죽었을 때 와타나베는 연인의 죽음에 대한 충격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여행은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진리를 재확인한 여행에 불과한 것이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친구이자 선생이었던 레이코 여사와 sex를 하고, 다음날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온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너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 낭만적 포스트모더니즘 vs 사실적 포스트모더니즘
지금까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상실의 시대>를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 그 속에 드러난 가벼움과 허무주의 등을 통해 비교해 보았다. 두 작품은 가벼움과 허무주의, 기존의 진리와 이원적 사고에 대한 반발 등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ㅡ특히 두 작품의 결말에서ㅡ 차이가 존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는 인간의 존재와 사회의 모습을 냉소적이고도 신랄하게 발가 벗긴다는 면에서 리얼리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이상으로 그려져있는 낙원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와 테레사는 삶의 마지막을 전원적인 시골에서 보낸다. 이런 낙원에서의 삶은 그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직선적 달리기 같은 삶과 달리 평화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곳에는 테레사가 질투해야 할 수많은 여자들도 없고 토마스를 괴롭히는 사회적 억압도 없다. 반복되지 않고 단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한없이 ‘가벼운’ 역사의 궤도로부터 벗어나, 따뜻한 삶의 뒤안뜰과도 같은 곳에서 그들은 행복을 느낀다. 이런 낙원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이 소설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패러독스이다.
쿤데라에게 형식은 논리나 전통적 정형성에 구애받지 않는 무형식의 형식이다. 그는 인과율의 원칙을 깨뜨리면서 비합리적 반모방의 원칙으로 존재를 탐구하기 위해 희극적 구성, 역설, 몽환적 서술, 꿈, 유희 등의 기재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낭만주의 문학을 연상시킨다. 낭만주의에서 소설은 앎 자체를 위한 앎, 앎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 인식의 이면에는 철학에 대한 성찰이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쿤데라 소설의 형이상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 쿤데라의 미학과 낭만주의 미학은 철학적인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상실의 시대는>는 리얼리즘적 성격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죽기 전에 이미 미도리를 선택한다. 죽음의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있어 이상이기도 했던 나오코를 선택하지 않고 현실 속의 생명력 넘치는 아가씨인 미도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나오코가 자살을 함으로써 그가 그녀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도리라는 현실 속의 여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이상의 세계는 이상이었을 뿐,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을 보면 서른일곱 살인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면서 나오코를 떠올린다. 정확하게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기억은 먼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에게 한 때 이상과도 같았던 나오코의 기억은 점점 멀어져가고 희미해져 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렇게 애타게 불렀던 미도리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의 현실에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현실의 그의 곁에는 미도리가 없을 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의 문체는 시종일관 일상의 경험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1960, 70년대의 일본사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글에 반영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어냈다. 이러한 점에서 <상실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과 함께 리얼리즘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Ⅲ. 결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상실의 시대>는 ‘가벼움’과 ‘허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쉽게 한 묶음으로 묶여진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모호한 제목에서 ‘참을 수 없는’이라는 형용사가 수식하는 것이 ‘가벼움’이 아닌 ‘존재’라고 말한다. 즉,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 사랑,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 한없이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사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에 맞게 지어진 제목이다.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노래 제목으로, 이 노래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랑의 덧없음, 상실감 등을 그린 노래다. 실제로 노르웨이의 숲은 마약밭이기도 하다.
두 작품은 모든 것이 요동치고 있는 사회 속에서 흔들리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고민을 그렸다. 이들은 내용면이나 주제, 주인공들의 성격 부분에서 드러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성에 상당히 비슷한 데가 많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특성인 상호텍스트성과도 연관된다. 두 작품 사이에는 서로 긴밀한 무언가가 있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1980년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어서, 와타나베를 프라하로, 토마스를 일본로 보내놓아도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될 듯 하다.
형식면이나 문체면에서 본다면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훨씬 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가깝다. 이에 비한다면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가 말한 대로 리얼리즘 문학에 더 가깝다. 두 작품은 동시대를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모습을 통해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키치를 끌어올려 가볍고도 담담하게 진지함과 무거움을 고민하는 두 작품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해 가하는, 기존의 것을 전복시키되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그저 ‘so what?’이라는 질문을 남긴다는 비판과는 거리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벼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전의 그 어떤 사조의 문학작품보다도 무겁다. 상대적으로 <상실의 시대>는 굉장히 무거운 소설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ㅡ하루키가 원했던 대로ㅡ사회의 어떤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기존의 것을 해체시키고 전복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현대 사회를 반영하는 리얼리즘적 성격도 띠고 있다는 것은, 현대 사회가 그만큼 해체되고 전복된 아노미의 상태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003년 2학기 문예사조사 레포트.
잘 했다고 뽑혀서 강의시간에 발표까지 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