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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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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pencilk 2013. 3. 9. 10:24
소설가로 산다는 것
국내도서
저자 : 김훈,김경욱,김애란,김연수,김인숙
출판 : 문학사상 201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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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등단한 뒤 몇 년간을 제외하자면, 나는 소설에 음악을 끌어들이는 일을 매우 꺼리게 됐다. 사실 나는 분위기 잡기 위해 소설에 음악을 집어넣는 사람들을 약간 경멸한다. 내가 쓸 소설에 끌로드 샬의 음악이 집적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내게 음악은 없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다.
말했다시피 음악은 내게 다른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다른 리얼리티라는 게 소설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작가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되지 못하면 소설가가 된다고 말하던데, 당치도 않은 소리다. 나는 연주자가 되지 못해 소설가가 됐다. 비록 멍청한 밴드를 결정하려고 한 게 다였지만, 음악은 언제나 내게 다른 리얼리티를 꿈꾸게 만든다. 삶은 잠이고 사랑은 꿈이다. 자는 동안에는 계속 꿈을 꾸고 싶다. 음악은 내게 그런 말을 한다. 


김종광
"요새 흔히 말하는 대로 소설들 중에 가장 안 읽히고 안 팔리는, 문학상과 문예지에 의해 유지되는 본격소설로 한정지어 말하자면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소설에 관심이 있거나, 소설을 쓰고 싶어하거나,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죠. 대중소설도 아니고, 본격소설에 관심도 없고, 서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쓰지도 않는 사람들이 뭐 미쳤다고 본격소설을 읽겠습니까? 소설보다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김훈
이야기란 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이야기란 현실의 결핍과 치욕을 덮거나 드러내거나 비틀어버림으로써 그 결핍과 치욕을 넘어서려는 언어의 화폭일 것이다. 그러하되, 현실과 화폭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를, 언어를 징검다리로 삼아서 건너가야 하는 이야기꾼의 운명을 나는 거의 감당하지 못한다. 당대의 역사적 구조 전체와 삶의 총체적 중량 전체를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작가가 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중생의 불완전한 언어로 더듬을 수 있는 작은 것들, 희미한 것들, 온갖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겨우겨우 말하는 쪼잔한 글쟁이가 되려 한다. 누구에게나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 터이다. 운명이라기보다는 팔자라는 말이 좋겠다.
나는 3인칭 주어를 거의 쓰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무섭고 낯설다. 가끔씩 3인칭 주어를 끌어다놓고 문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3인칭 주어를 뒷받침할 만한 술어를 찾아내기란 대체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쓴 3인칭 문장은 그 허우대만 3인칭일 뿐 결국은 1인칭에 불과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하는 수 없이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긴다. 이게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가장 절망적인 장벽은 그 3인칭 인물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일이다. 허구의 고유명사를 지어내는 일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해내야 하는 일일 터인데, 내 언어의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해낸다는 것은 말짱 개수작으로 느껴진다. 갑이라고 인물의 이름을 지었다고 할 때, 그 갑이 누구인지 어찌 내가 설명하거나 묘사해낼 수 있겠는가. 인간이 언어로 3인칭을 진술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 누구가 대체 누구일 것인가.

언어는 이 세계의 불완전성의 소산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해 부정당해 마땅한 것이고 부정당하기를 거부하는 언어는 이미 언어가 아닐 것이다. 언어에게 소통 기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부정당하는 운명을 수락하는 그 불완전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듣는 자가 없는 시대의 말하기란 말이 아니라 재앙이다.
내가 부릴 수 있는 몇 개의 영세한 어휘들은 사전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강물이나 바람이나 노을 속에서 얻은 것이다. 얻었다기보다는, 얻었다는 몽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아마도 그 어휘들은 강물이나 노을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을 것 같다. 사전에 보니까, '노랗다'라는 단어는 '개나리꽃 빛이다'라고 설명해놓았다. 나는 말이 한심해서 사전을 덮었다. 사전은 동어반복의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노랗다'는 경험될 수 있을 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경험의 내용은 노, 랗, 다, 라는 어휘와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이다. 말을 하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말을 해서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경린
여기 없는 또 다른 현실을 창작하는 인간들은 이 세계 내의 타자로서의 자신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절실하게 인식하고, 동시에 자기 내부에서 일어서는 불굴의 주체를 분명하게 의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 세계와 자신 사이에서 강렬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세계에 대해 자기중심적으로 대응한다. 우리는 타자에게 가기 위해 자신을 떠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시기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자기중심을 뚫고 통과해서만이 타자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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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책 곳곳에 귀퉁이를 접어놓은 흔적은 보이는데 따로 정리를 해놓은 기억이 없어서,
이제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