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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ㅣ 베스트극장 - 태릉 선수촌 본문

THINKING/드라마

드라마ㅣ 베스트극장 - 태릉 선수촌

pencilk 2007. 3. 19. 05:26


민기 : 너 혹시 내가 부럽냐? 
        한살이라도 젊은 나한테 수아 뺏길까봐 겁나서 그러냐고, 이 새끼야.
동경 : 어.
        그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잘난 거, 
        앞뒤 안 가리고 막 쑤셔놓고 박살 나는 거,
        그 뭐야, 욕 먹고도 뻔뻔하게 버티는 거, 
        다 부럽다.
민기 : ......
동경 : 진심이야. 부러워 정말로.

 
유도 잘 하는 놈이 어떤 놈인줄 알아?
잡고 흔들 때 뻣뻣한 놈?
아니.
흔드는 거에 따라서 휘청휘청 출렁이는 놈이야.
세상 일이라는 것도 보면 유도랑 참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애.
뻣뻣해선 절대 이기지 못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출렁출렁 리듬을 타야 돼, 편안하게.
그러면 언젠간 이길 수 있어.
시합이 좀 길어지더라도.
슬럼프건 시합이건 인생이건, 어차피 장기전이지만
끝은 있는 법이거든.


민기 : 어때요? 시원섭섭해요?
동경 : 니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이 자식아.
민기 : 저도 떠날라구요.
        유도는 관중이 있길 하나, 그렇다고 뭐 누가 알아봐주길 하나.
        쥐꼬리마한 월급에.
        ...핑계 같아요?
동경 : 어.
민기 : 그러면은 형은 왜 은퇴하는데요?
동경 : 뭐 이제 나이도 있고, 체력도 딸리고, 기록도 안 나오고.
        ...왜, 핑계 같애?
민기 : 예.
동경 : 야 이자식아, 형 나름대로 비장해 이 자식아.
        꼭 마약 끊은 기분이야. 중독.
        왜 너도 그러잖아. 시합 끝나고 나면 쫌만 더 잘 할걸,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죽자사자 연습 더 하고 그러잖아.
        나도 그랬다.
        그 지난번 올림픽 Final 8 나갔을 때 진짜 너무 아쉬웠거든.
        쫌만 턴 빨리 할 걸, 쫌만 손 더 뻗을걸.
        쫌만 쫌만 쫌만 쫌만.
        아유, 정말 죽겠더라고.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굴러온 건데.
        야, 내 나이면 수영에서 환갑이거든?
        근데 아직도 내일 당장 올림픽 나가면 메달 딸 것 같다니까.
        그거 끊는 게 제일 힘들더라.
        근데 지금 생각해봐도, 내 일생일대의 가장 용기있는 결정 같애.
        대견해, 내가.


사람은 누구나 우물을 하나씩 안고 있대.
깊이도 다르고, 맛도 다르고, 성분도 다른 우물 말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두 가지야.
마셔서 힘이 나는 우물과 그 안에 빠져 죽고마는 우물.
내 우물은 어느 쪽일까.
빠져 죽는 쪽일까봐 겁이 나.


 

+
나 역시 홍민기가 부러웠다.
그 넘쳐 흐르는 자신감과
박살날 거 뻔히 알면서도 덤비고 쑤시고 돌진하고
그렇게 욕 먹고 깨지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고개 드는 무모함이,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담담하게 그의 젊음을, 그 무모함을, 자신감을
부럽다 말할 수 있는 이동경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넘쳐 흐르다 못해 눈까지 멀게 했던 자신에 대한 과신과 중독에 가까웠던 집착을
반듯하게 접을 수 있었던 그가, 나 역시 대견했다.


하지만 그래서 너무, 이동경이, 아팠다.
8부작이라는 짧은 드라마 속의 시간은 홍민기 인생의 클라이막스였기에.
홍민기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였던 그 시간이
이동경에게는,
인생의 절정의 끄트머리에서, 아직 어디로 발을 떼야 할지 잘 몰라
흔드는 대로, 그렇게 휘청거려야 하는 시기였기에.



방수아가 이동경을 버리고 홍민기에게 갔을 때,
처음으로 무너진 모습을 보이던 동경에게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왜 이래, 오빠 강한 사람이잖아.
방수아가 홍민기에게 가서 그녀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그녀를 정말 원망했다.
너 강한 사람이잖아, 라는 말처럼 잔인하고 이기적인 말이 있을까.
너 때문에 강할 수 있었던 거야, 라고 말하던 동경이 참 쓰렸다.
홍민기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녀석이었지만,
그렇지만 이동경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어쩔 수가 없는 나를 보면서
나란 인간은 역시 홍민기 같은 풋풋한 젊음과는 거리가 멀구나,
그래서 이동경에게 더 공감하고, 이동경을 더 안타까워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홍민기는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녀석이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내게 하는.
자기 자신을 조금도 숨김없이 너무 다 드러내 보여서
그래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녀석.


홍민기처럼,
억지로 버티지 않고 흔드는 대로 휘청휘청거리며 살아야겠다.
뭐 지금도 휘청거리고 있긴 하지만.

 


드라마 마지막에 흐르던 이승환의 '물어 본다'
가사가 태릉 선수촌과 참 잘 어울렸다.



물어 본다
                         - 이승환


많이 닮아 있는 건 같으니?
어렸을 적 그리던 네 모습과
순수한 열정을 소망해오던 푸른 가슴의 그 꼬마아이와
어른이 되어 가는 사이 현실과 마주쳤을 때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 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푸른 가슴의 그 꼬마아이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
어른이 되어 가는 사이 현실과 마주쳤을 때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 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더 늦지 않도록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