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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드라마

드라마ㅣ 일지매와 요시마타 료의 음악

pencilk 2008. 7. 14. 23:51

첫 회 첫 장면부터 카메라를 노려보며 읊조리는 “난 일지매니까”의 압박으로 닭살 돋게 만들고, 연이어 터지는 '철제마스크'와 '투명망토'라는 다소 극단적인 상상력과 저렴해 보이는 CG 효과들로 끝내 채널을 돌리게 했던 드라마 <일지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될 때 시청자들은 첫 회의 첫 10분에서 그 드라마를 계속 볼지 말지를 대부분 결정한다. 첫 10분이 재미 없어서 채널을 돌렸던 이들은 나중에 ‘그 드라마 재밌다더라‘라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이미 ‘앞부분을 놓쳐버렸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외면하기 쉽다. 그런 면에서 <일지매>의 시작은 최악이었다. 일지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진행되는 1부와 2부에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엄청나게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모두 설명되는데, 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 이원호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는 <일지매>라는 드라마를 제대로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처럼 첫 10분 때문에 채널을 돌려서 1, 2부를 놓쳤던 이들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드라마이고, 그렇다고 지나간 1, 2부를 다시 찾아 볼 정도의 부지런함을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가장 멋있어야 할 첫 회에서의 첫 도둑질 장면이 그토록 오버스럽고 유치했으니. 나는 다음날 회사에서 카메라를 향해 책 읽듯이 내뱉는 이준기의 '난 일지매니까'를 따라 하며 마구 비웃었드랬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 시간대에 딱히 볼만한 다른 드라마가 없어 별 생각 없이 <일지매>를 틀어놓게 되었고, 우연히 보게 된 한 장면이 가슴에 박혀 들어와서 1부부터 다시 찾아서 보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재미 있는 드라마는 놓친 1부부터 다시 챙겨보는 소수의 부지런한(?) 타입의 인간 유형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은, 의외로 굉장히 짧은 장면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은 용이는 드라마 초반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죽도록 얻어 터지고 도망 다니면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니가 겸이냐”며 죽이려 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객에 의해 얼음 물속에 빠진 용이가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에 정신을 차리고 얼음물을 뚫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이 이상할 정도로 뇌리에 박혔다. 이유는 그 장면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음악 때문이었다.(물론 이준기의 연기도 한몫 했다) 바로 메인 타이틀곡인 ‘외로운 발자국’이었는데, 이 음악은 이후에도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다가 결정적으로 터지는 순간에 어김없이 흘러나와 나를 감탄시켰다.


드라마를 찬찬히 보다 보니 메인 타이틀곡 외에도 여러 곡이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음악들이 하나같이 굉장히 좋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매화나무 신만 나오면 흘러나오는 박효신의 ‘화신(花信)’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OST에서 리메이크 되었던 ‘눈의 꽃’과 첫 마디 멜로디가 매우 비슷하다. 게다가 두 곡 다 박효신이 부르기까지 했기에, ‘화신(花信)’을 들으면서 ‘눈의 꽃’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회상 신이나 추억에 잠기는 신 등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매화’라는 경음악 역시 내가 최고의 OST 앨범으로 꼽는 일본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 OST 중 ‘Godsend’라는 곡과 앞부분 멜로디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곡이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매화’와 ‘Godsend’의 작곡가는 같은 사람이었던 것. <일지매> OST를 만든 이는 일본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과 <프라이드>, 그리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OST를 만든 ‘요시마타 료’였다.

‘과연’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서서히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펑’하고 터질 때 쏟아지듯 흘러나오던 피아노 선율과, 중간에 잠시 음악이 멈추면서 극도로 팽팽해진 긴장감을 다시 한번 터뜨리곤 했던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의 ‘Resolver’. 그 곡을 만든 사람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형수님은 열아홉>이라는 드라마에서 ‘Resolver’를 편곡해서 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특히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한 여자를 둔 두 남자의 대결, 과연 이 세 사람의 운명은?’이라는 문구와 함께) 커플 결정 직전의 극적인(?) 순간이나 예고편 용으로 ‘Resolver’를 남발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과 ‘Resolver’의 팬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OST 음악은 그 자체로도 좋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에 맞아 떨어지는 영상과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로 빛을 발한다. ‘Resolver’ 역시 그랬다. 특히 유코와 만나기로 한 영화관 앞 횡단보도에서 칸조와 료가 스치는 신은 그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와 폭발하듯 쏟아지는 ‘Resolver’의 피아노 선율 때문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일지매>의 용PD 역시 요시마타 료에게 OST 작업을 요청할 때 ‘Resolver’를 능가하는 곡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로운 발자국’은 충분히 ‘Resolver’를 능가하는 수준의, <일지매>라는 드라마의 특성에 꼭 맞는 최고의 곡으로 탄생되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의 ‘Resolver’가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의 곡이라면, <일지매>의 ‘외로운 발자국’은 심장이 뛰게 하는 현악 선율이 압권인 곡이다 ‘Resolver’와 ‘외로운 발자국’의 공통점은 드라마 각 회마다 위기와 절정, 그리고 반전이 등장할 때 쏟아지는(이 음악들은 그야말로 ‘쏟아진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드라마 각 회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계획대로 밧줄이 끊어지고 용이가 누이를 구하게 될 거라는 예상을 깨고 누이가 죽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을 때도, 자신 때문에 그림 도둑으로 몰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매화 그림을 남기고 갔을 때도, 요시마타 료의 음악은 그 장면들의 8할이었다.




OST에 수록된 ‘외로운 발자국’은 메인 타이틀 버전과 기타 버전의 2가지 버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드라마에 자주 쓰이는 버전은 첼로 선율을 줄여 멜로디 라인을 죽이고 좀 더 강한 타악기가 더해진 웅장한 버전이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버전도 좋은데 OST에 실리지 않아서 아쉽다.


OST에 실리지 않아 아쉬운 또 한 곡은 용이가 일지매임을 눈치 채고 일지매의 아지트에 찾아간 쇠돌이,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용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흘렀던 음악이다. 그냥 단순하게 매화 그림과 일지매 갑옷 발견하고 '용이가 일지매였구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부터 떠올리고 마는 쇠돌의 마음이 표현되어서, 나는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이문식씨의 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특히 이 때 흘렀던 음악은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 작곡(혹은 편곡)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영상과 완벽한 조화를 보였다. 비통할 정도로 슬프다가, 그림을 발견하는 순간 심장 박동수가 커졌다가, 이내 용이가 기억을 되찾았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쇠돌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음악이었다.


이번주 방송 분에서 쇠돌이 죽는 것으로 아는데(흑), 쇠돌이가 죽는 건 정말 안타깝지만 그보다 더 슬프고 걱정스러운 것은 다음 주면 <일지매>가 종영된다는 사실이다. 인기 많다고 괜히 연장 방송 해서 내용 질질 끄는 건 반대지만, 마지막에 가서 앞에 꼬아놨던 스토리들을 급 해결 해버리는 것은 더더욱 반대다. <일지매>는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워낙에 많이 꼬여 있어서, 무리하게 20회로 끝내려고 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릴 까봐 걱정이다. 지금까지의 대본과 연출을 보아 용PD와 최란 작가를 믿지만.


마지막까지 호흡을 잃지 않는 드라마가 되길.
그리하여 마지막회에서 흐르는 '외로운 발자국'에 다시 하번 소름이 쫙 끼치는 경험을 하게 해주길 기대해본다.

컨텐츠팀 정현경

 


YES24 도서팀 블로그 <책방이십사> - '북C의 문화생활'
원문 : http://blog.yes24.com/document/1019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