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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ㅣ 달콤한 인생 본문

THINKING/드라마

드라마ㅣ 달콤한 인생

pencilk 2008. 8. 23. 02:05


홋카이도로 떠나기까지, 이제 딱 이주일이 남았다.
지난 5월 도쿄로 여행 갔을 때에 첫방송을 해서 처음부터 놓치기 시작해, 계속해서 개콘과 엇갈려 보다 말다 했던 드라마 <달콤한 인생>의 1-2회에서 홋카이도, 특히 오타루 풍경이 좋았다길래 다운받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조금씩 봤을 때는 '지나치게 폼 잡는 드라마'로 느껴졌던 이 드라마, 왜 명품 드라마 명품 드라마 했는지 알았다.

뭐랄까. 한국에서는 결코 많지 않은 '지나치게 진지한' 드라마이다. 그저 피상적인 인물들의 상황과 관계도만을 말했을 때는 한없이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드라마. <마왕>이나 <부활> 정도였을까. 복잡한 인간 심리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건드리고자 시도한 한국 드라마는.




조금씩 봤을 때 느꼈던 가장 큰 혼란은 바로 이준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 불능에서 비롯되었다. 첫회부터 차곡차곡 보지 않았던 나에게 윤혜진을 사랑한다면서 다애를 지나치게 따뜻하게 대하는 준수의 태도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저 유부녀의 연하남과의 과감한 불륜 정도로만 스토리를 파악하고 있던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당당하게 말해놓고는 '잘못했어요, 여보' 라며 하동원에게 매달리는 혜진의 모습 역시 모순이었다. 도대체 이 드라마 뭐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첫회부터 다시 보면서,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럴 수도 있겠구나'의 공감은 아니다. 오히려 저럴 수 없을 거다, 라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로. 이 드라마는 판타지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이런 감정으로 엮이는 사람들, 현실에선 없을 거다. 제작 발표회에서 김진민 감독이 말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깔려 있는 외로움, 고독, 그리고 욕망. 그리고 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순수함. 그런 것들에 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고 고민하고 방황하고, 또 도망치기도 하면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잊고 있었던,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 때 나는 지나치게 무겁게 살았었다. 홈페이지 일기장에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온갖 분석과 인간관계 및 사람과 사람간의 감정에 관한 수많은 고민들로 가득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치열하게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먹는 족족 토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면서, 지쳤던 걸까.

이제 내 홈페이지의 일기장은 어느 정도 길이를 넘기는 적이 별로 없고, 친구들을 부담스럽게 할 만한 심각한 문자 따위 절대 보내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현경씨는 역시 쉬크해" 라는 둥의 이야기를 듣는 '귀차니즘계의 대부' 쯤으로 평가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삶이, 그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던 때보다 가벼워졌다고, 너무 가벼워서 하찮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준수처럼 어둠과 절망의 나락 끝까지 떨어진 인간도 아니고, 혜진처럼 생명이 없는 장식품처럼 살아온 인간도 아니며, 동원처럼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성공한 삶을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의 사냥감으로 생각하며 사는 인간도 아니고, 다애처럼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몸도 영혼도 파는 인간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지금의 이 삶에 만족하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아직 변함 없다. 매번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다가는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을 거다. 이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메었던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이다. 이 드라마가 필요한 것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에게, 드라마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이기에 건넬 수 있는 이야기들. 그저 십대 사춘기 시절에나 잠깐 하고 말았던, 돌아보면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심각했던 그 많은 생각들에 대해, 그것이 과연 그 시기에만 하게 되는 '쓸데 없는' 생각이 맞는지, 어쩌면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느끼게 되는 정체 모를 불안함 같은 형태로 다시 떠오르곤 하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묻고있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이 드라마로 인해,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조금씩 생각하고 있다.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러기엔, 내 앞에 닥쳐 있는 현실의 무게가 훨씬 더 커졌기에. 하지만….

언젠가부터 당연하다는 듯 포기하고 살았던 것들이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지.
그런 게 존재했었지.
산다는 건, 그런 거였지.
…하는 생각들을 하게 해준 드라마였다.




1.
그렇다. 죽자고 북해도까지 온 것이 아니다. 살 길이 있을까봐,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2.
그것은 내 인생의 오점 같은 것이면서, 또한 불꽃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남편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한 남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날 발견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도대체 사랑이란 뭘까.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한번 시작하면 저절로 돌아가는 수레바퀴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항상 새롭고 창조의 기쁨으로 넘쳐나는 생명력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는 그저 살아왔다. 뒤돌아볼 것도 없는 평범한 생활들. 사랑도 없이,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에 매달려서.

3.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좋아서, 그저 좋아서 맺어지는 관계와 필요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는 무엇이 다른가. 결국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좋아한다는 말이 굳이 사랑이라는 말과 구별되어도 좋다.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눈빛으로 바라봐 준다면.

4.
준수 : 세상에 정말 사랑 같은 게 있는 걸까?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순수한 사랑.
다애 : 그런 걸 왜 세상에서 구해? 그런 건 니 마음 속에 있는 거 아냐. 정말 원하면 그런 건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거라구.

5.
이해한다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두려움.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설레임.

6.
애들 때문이 아닌지도 몰라. 이 나이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애들 핑계를 대는 건지도. 모른 척 했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고백할 때까지 기다렸으면, 고백을 안 하면 그래도 모른 척 하고 그러면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헤어졌을지도 모르잖아. 그랬으면, 그랬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죽겠다고 북해도에 갔을 리도 없을 것이고 거기서 준수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니... 그걸 후회해선 안돼. 준수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유일한 불꽃 같은 건데, 죽는 날까지 모르고 살 수도 있었잖아. 온몸이 부서져나갈 것 같은 이 삶의 환희를.

7.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 가라고 한다고 그냥 가는 모습에도 질투를 느꼈고, 이상하게도 내 앞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에도 질투를 느꼈다. 그 행복은 내가 만들어준 행복일까?

8.
갑자기 막막하더라구. 어떻게 살까. 그 전까진 세상은 그저 단순하고 쉬운 거 같았는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힘들거나 안 좋은 일 생기면 길 가다 재수 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셈 치고 옷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가면 그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잖아. 여기저기 상처들이 쌓이고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낙인이 찍히는 거야. 도대체 난 왜 그렇게 살아온 거야?

9.
내 인생에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몫이 얼마나 될까? 애들은…. 아니, 산다는 게 수학공식처럼 그렇게 나눠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숫자로 나눠지는 게 인생이라면. 그러면, 그렇다면 삶의 욕망이나 열정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어느 한순간에 나는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10.
남편도 나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고 이어나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사라져 버리자 남편이 생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작 무서운 건 내가 아닐까. 내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싶다. 어디다 비춰봐야 내 모습이 보일까. 나 역시 내가 타인처럼 느껴진다.

11.
끝일지도 모른다, 거기가 내 인생의. 여기서 멈추면 나는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겠지. …여전히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 날의 만남도, 사랑도, 그리고 이별도.
아니, 하루 아침에 변해 버리겠지. 추악한 과거로.
그래, 그렇게 살아가겠지. 수많은 상처들을 추억삼아….

12.
다애 : 네, 준수가 나보다 윤혜진씰 더 좋아하고 있다는 거 인정해요. 

       하지만 집도 가정도 남편도 애들도 다 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예요. 꿈이라구요, 그런 건.
혜진 :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내가 다애씨 인생에 뛰어든 건지도 모르겠네요. 

       사는 건 수많은 가정의 연속이잖아요. 

       만일 그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조금만 더 일찍 만났거나 혹은 조금만 더 늦게 만났다면…. 

       그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쩌면 인생은 우연의 연속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사는 게 정말 우연의 연속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사는 게 너무나 서글프잖아요.
다애 : 북해도에서 준수씨를 만난 건 운명이란 뜻인가요.
혜진 : 그런 뜻이 아니예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건, 내가 선택한 거예요.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피해갈 수 있는 우연을 내가 선택한 거라구요.

13.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요. 난 그걸 잘 알고 있다구요.
변하지 않는 건, 죽은 것뿐이에요.
살아 있는 건 다 변한다구요.


+
세상은 사랑만 가지고 사는 게 아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얼마든지 있다구.

세상에… 세상에 그래두 값어치 있는 게 있을 거 아냐. 괴롭고 힘든데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 어떨 땐 내 자신을 팽개쳐버리고 싶을 때 달려가서 꼭 붙잡고 늘어질 수 있는 거. 난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



보일 때나 보이지 않을 때나 난 항상 당신 옆에 있어요. 
내가 보고 싶으면 손을 들어 아무데나 만져보세요. 이렇게. 
만져보세요. 내가 느껴져요?
난 당신이 보고 싶으면 아무데서나 눈을 감아요. 그럼 당신이 떠오르죠.
내가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으면, 거기 당신이 서있어요.




세상은… 내가 그리워하는 대로 변해요.
내가 바다를 그리워하면 세상은 바다가 되구요. 
내가 산을 그리워하면 세상은 산이 돼요. 
내가 혜진씰 그리워하면 세상은 온통 혜진씨로 변하구요.
당신이 날 그리워하면 세상은 온통 내 모습으로 가득할 거예요.

그래.
그리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거야.



 
 
YES24 도서팀 블로그 <책방이십사> - '북C의 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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