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아주 오래된 농담

1. 이 소설 속에 그려져 있는 한국 가족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인가

가족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가, 아니면 굴레가 되는가. 이 문장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이었다. 특히 서구 사회에 비해 한국 사회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이 바로 그 가족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ㅡ그래서 벗어나고 싶어지게끔 하는ㅡ 책임과 그러한 가족이 주는 정신적 안정의 모순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다른 그 어떤 사회보다도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회다. 가족에 의해 개인의 삶이 엄청난 영향을 받고 심지어 인생이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늦둥이 동생 영묘가 태어났을 때,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남인 영준과 차남인 영빈의 반응은 엇갈린다. 영빈은 그저 소년으로써 한 생명의 탄생에 감탄하고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영준은 ‘장남’으로써 동생의 탄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영묘가 태어나서 짐이 하나 더 늘어났다며 자신의 여동생을 향해 ‘재수 없는 년’이라고 내뱉는다. 그 누구보다도 가족의 이름으로 얽매이는 것을 혐오했던 그는 어머니의 여러 가지 바램들을 외면한 채 미국으로 떠나고, 그러한 모습은 그가 어느 정도 장남 역할을 회피하고자 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자신의 인생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영빈은 초등학교 동창인 현금과의 불륜을 통해서 의사라는 직업과 답답한 결혼 생활, 궁극적으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긴다. 그는 집에서는 아들 노릇, 아빠 노릇, 남편 노릇 등의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반면 현금의 앞에서는 한 남자 노릇만 하면 된다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가족의 굴레는 영빈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잔인하게 드리워진다. 영묘는 자신의 시집 식구들이 무언가 이상하고 자신의 가족들과 다르다고 느낀다. 그녀는 시집 식구들에게 끝까지 ‘며느리’라는 이름의 남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출가외인’이지만 늘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안타깝고도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영묘의 남편인 경호가 암으로 죽어갈 때, 송회장 가족은 경호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는다. 그의 여린 마음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유산분배에 있어서 경호에게 결정권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경호의 장례식 때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비디오에 담음으로서 자기 과시를 하는 등 온갖 참을 수 없는 송회장 가족들의 만행에도 영묘는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두 아들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이 시집의 엄청난 재산을 포기하면 바보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끈끈한 정과 사랑처럼 보이는 가족들의 굴레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 철저하게 왜곡되고 장남의 가족에 대한 과중한 책임과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기대, 딸 가진 죄로 사위가 암으로 죽은 것에도 마치 자신의 딸이 남편을 잡아먹은 것처럼 시집 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어야 하는 가부장제 사회, ‘가족은 이래야 한다’와 같은 모범 답안이 있는 듯한 사회 분위기,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가족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지나칠 정도로 뒤흔들어버린다는 것, 그러한 것들이 한국 가족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돈에 대해서 말한다는 게 여성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돼버린 것도 독자가 눈 여겨 봐주었으면 한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한국에서의 가족에는 ‘돈’이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다. 결혼할 때 서로의 집안과 재산에 대해 견주어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호가 죽을 때 재산에 대한 유언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끝까지 그에게 병명을 말해주지 않았던 영묘의 시집 식구들의 행동 역시 결국은 돈 때문이다. 영묘가 그런 시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절반은 ‘돈’ 때문이었다. 마지막에는 영준이 돌아와서 모든 복잡한 가족의 문제를 다 해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그 역시 결국은 돈에 의한 해결이나 다름없었다. 영준이 선뜻 100만 불을 학교에 기부하자 송 회장 식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즉, 결혼을 하고도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각자의 재산을 인정하는 서양과 달리, 결혼을 함과 동시에 서로의 재산이 내 것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재산을 포기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2. 이 작가가 암암리에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해결방안은?

이 책에서 현금은 자본의 지배력이나 가부장적 제도 밖에서 떠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도 결코 시집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았고 남편이 아이를 원하자 가차없이 이혼한다.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아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낳아‘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한국 사회다. 이혼 후에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던 현금은 영빈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폐경기에 다다른 그녀의 몸은 불임의 자궁이다. 그녀는 영빈을 만나면서 어떤 순수함과 사랑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 실상은 그녀의 영빈의 첩일 뿐이었다. 결국 가부장적 질서 밖으로의 일탈이 아니라 그 질서의 이분법 안에 현금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리게 되고, 따라서 생생한 생명에 대한 그녀의 욕망 역시 불가능하게 된다.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았던 현금은 결국 가부장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영준 역시 마찬가지다. 모교에 돈을 기부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영준은 영빈에게 그 누구보다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미국에 갔던 사람답지 않은 말을 한다. 그는 미국으로 가고 나서 한국적 상황에서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결국 단 한 순간도 가족에게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혼을 하고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도망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국의 이 가부장적 질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거다.
영준은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엄청난 굴레가 되어 숨을 조여오는 것 같은 가족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더 악착같이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굴레로서의 혹독함이 너무나 강한 한국 사회의 가족은 한편으로 그 완벽한 테두리로서의 안정감 또한 엄청나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에 비해 가족 간의 결속력이 더 강하고 그래서 그 안에서 사람들은 더 큰 안정감을 느끼고 힘을 얻는다. 그 힘으로 사람들은 먼 미국 땅에서도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가족이 동기가 되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위도 빨리 따고, 돈도 개같이 벌고, 차별대우도 감수하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 유혹도 이겨낸다. 구속이 강한 만큼 결속력도 강해서 가족으로부터 받는 힘의 크기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한국 가족이 크다.
가족이 굴레가 될까, 힘이 될까. 영준은 영빈에게 힘을 받아 굴레를 끊을 만큼 강해지라고 말한다. 어차피 한국 사회 뿌리깊이 박혀있는 가부장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가족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피해 도망만 쳐서는 결코 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현금처럼 그저 표면적으로 가족이라는 제도로부터 도망만 칠 것이 아니라,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되 그 가족이 자신에게 주는 힘으로 강해질 것, 그래서 진정으로 가족이라는 굴레에 속박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을 만들라는 것이 이 작가가 제시하는 해결방법이 아닐까. 가족 사이에서 지겹도록 계속되어온 수많은 거짓말들을, 현금이 말한 것처럼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어 넘길 수 있는 그런 자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