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가족 해체
- 미국 가족과 한국 가족에서 보이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
Ⅰ. 서론
헐리우드 가족 영화는 대부분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끝이 난다. 미국의 가족 드라마가 급증하고 헐리우드에 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이는 1970년대부터 가족의 위기가 본격화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 번영하고 사회가 안정적이었던 일명 ‘아메리칸 드림’의 1960년대에 많은 지지를 얻었던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가족론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구조기능주의는 어떤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족이 우리 사회에 ‘기능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조 기능주의가 주장하는 가족의 기능은 출산, 양육 및 사회화, 정서적 유대, 지위 재생산, 가족 부양 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가 변화하면서 이러한 가족은 기능은 점차 변화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이상적인 공간이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제도 자체의 모순에 대한 논쟁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가족 해체’를 다룬 영화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족의 해체를 다룬 동양과 서양의 영화를 통해 동•서양의 가족을 비교해보고 각각 가족의 해체 과정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알아본다.
Ⅱ. 미국 자본주의 사회 중산층 가족의 해체 -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교외 중산층을 배경으로 미국 가족제도의 붕괴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가까이 들여다보라'라고 쓰여있다. 주인공인 레스터가 사는 마을은 붉은 장미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교외 주택이다. 레스터의 가족은 멀리서 보면 남편과 아내, 그리고 딸로 이루어진 정상적이고도 평온한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 그 자체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이 가족은 이미 붕괴된 상태다.
레스터 가족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아내인 캐롤린이 부동산업자로 일해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면서부터이다. 그는 회사에서 언제 해고될 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아침에 샤워하면서 자위하는 순간이 하루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인 무기력한 가장이다. 아내와 딸은 무능한 레스터를 경멸하고 가족 간의 대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의 경제적 무능은 모든 부분에서의 무능으로 이어져 패배자로 몰아간다. 1970년대의 세계 경제 위기로 미국 중산층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가장 혼자만의 가족 부양이 어려워짐에 따라 가장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미국의 여성 운동에 힘입어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가족 안에서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편과 그렇지 못한 아내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엥겔스는 이러한 경제적 지배가 소멸되면 가족 안에서의 평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부간의 경제적 평등은 더 이상 ‘가족’을 평화로운 집단으로 놓아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가족의 평화는 수많은 여성의 희생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이런 가족 해체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사회는 여성들에게 ‘가족 중심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점점 일터를 가정처럼, 그리고 가정을 일터처럼 인식하기 시작했다. 가사 노동이라는 것은 단순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고 사회적으로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으며, 대가를 받지도 못하는 소외와 고립을 야기시키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요도의 중심을 가족에서 일터로 옮기면서 가족의 가치가 상당히 폄하되기 시작했고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레스터 가족은 가족 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역할로부터 벗어나 각자 자신들의 욕구대로 행동하고 그로 인해 결국 이 가족은 파국에 이르게 된다.
<아메리칸 뷰티>에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맞벌이 부부의 모습이 있다. 레스터의 아내인 캐롤린은 미국적 성공 신화로 무장한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는 남편의 무능함을 경멸하며 자기 성취욕에 불타는 여성이지만 현실은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여성일 뿐이다. 하루 종일 고생하고도 집을 팔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울지 말라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더 이상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 성공한 여성에 대한 신화는 캐롤린의 사업에 대한 강박과 자기 학대로 나타나고 이는 결국 성공한 부동산 갑부와의 성적 관계를 통한 동일시로 해소된다. 이 영화는 캐롤린에 대한 묘사를 통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에 의한 이중 노동 여성의 현실을 남성적인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연애 시절을 추억하며 화해를 시도할 때 이태리산 소파에 맥주가 쏟기는 것을 더 걱정하는 속물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언뜻 보기에는 이들 가족의 붕괴가 일어난 것이 모두 그녀의 탓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제도의 희생양일 뿐이다. 이전에 비해 여성의 해방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전히 힘들고 괴로운 이유는 현실과 제도의 변화가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스터의 딸 제인은 무능한 아버지와 물질 지상주의에 빠진 어머니를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번듯한 아버지를 갖기를 소망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그녀는 “친구에게 욕정하는 아버지 따위는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후에 나오는 정황을 보면 그냥 해본 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유방확대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평범한 미국 젊은이에 불과하다. 한 때는 온 가족이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음이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화목한 가족 사진을 통해 나타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지위와 역할을 내팽개친 채 철없는 행동을 일삼는다. 캐롤린은 부동산 갑부와의 불륜을 즐기고 레스터는 딸의 친구인 안젤라와 자기 위해 근육을 키우는 등 희화화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의 갈등도 더욱 심화된다. 캐롤린은 레스터에게 자신의 외도를 들키자 결코 희생물이 되지 않겠다며 남편을 죽일 결심을 한다. 이렇게 가족이 붕괴되어가는 이유는 그들 개개인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 장벽 때문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결함에서 원인을 찾고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그렇다고 형식만 남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밖으로 나가서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구조 지워진 현재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을 드러낸다.
극으로 치닫던 영화는 레스터가 안젤라와 마침내 sex를 하게 되려는 순간, 자신의 상상과 달리 그녀 역시 순진한 10대 소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해피엔딩의 기미를 보인다. 레스터는 결국 안젤라와 sex를 하지 않고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는 등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되찾는다. 그리고 가족 사진을 보면서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작은 오해에 의해 이웃집 남자에게 살해 당한다.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한 강조, 가장의 권위 살리기와 같은 방법들이 결코 가족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이성애 가족과 동성애 가족의 비교를 통해 기존 가족 제도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레스터 가족의 이웃에는 동성애 커플이 살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약간의 거부 반응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자신있게 자신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힌다. 이는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동양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서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이성애적 가족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에 비해 이 동성애 커플은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전문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가족 내에 정형화되어 있는 성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메리칸 뷰티>는 성공 신화가 더 이상 다수에게 현실화될 수 없는 사회에서 성공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실패자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 해체를 보여준다. 가장의 실패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물질주의와 성공신화가 가족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고 그것이 만들어낸 미국적 아름다움의 허상을 비판한다. 영화가 쓰러져가는 미국 문명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이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않는 것,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이 영화가 내내 미국 중산층의 가족주의를 풍자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다시 그 가족주의를 찬양하면서 끝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Ⅲ. 한국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가족의 해체 - <바람난 가족>
<아메리칸 뷰티>가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바람난 가족>은 가부장적 유교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메리칸 뷰티>의 가족들은 핵가족인 반면 한국 영화 <바람난 가족>에 나오는 가족의 형태는 3대가 함께 사는 확대 가족이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도발적 문제 제기로 좋은 평을 많이 받기도 한 반면에 영화 속에서 호정이 영작에게 하는 대사처럼 ‘쿨한 척 하지만 전혀 쿨하지 않은’, 즉 가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남자가 만든 영화라는 평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주인공 영작은 돈 안 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도맡아 하는, 비교적 정의로운 30대 변호사이다. 남편은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의 아내 호정은 전직 무용수였지만 현재는 동네 무용학원에서 춤추는 것이 전부인 30대 주부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입양한 7살짜리 아들 수인이 있다. 이들 부부는 아직 어린 수인에게 자신이 입양된 아이임을 얘기해주었고 수인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수인이 자신의 입양 사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어머니 호정 뿐이다. 수인은 매일 늦는 아버지와 대화는커녕 얼굴을 마주할 시간도 별로 없다.
영화 속의 호정과 수인의 캐릭터는 이 영화가 원하는 대로 ‘쿨’한 듯 하다. 겨우 7살짜리 수인은 어머니인 호정에게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몰랐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며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호정은 그런 수인에게 “그게 사실이니까 너만 모르는 건 불공평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실제로 영작과 호정 부부는 불임이어서 수인을 입양하긴 했지만 수인을 친자식처럼 사랑한다. 하지만 입양아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아직도 차갑기만 하다. 수인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놀리거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다른 엄마들은 배 아파서 낳았지만 우리 엄마는 가슴 아파서 나를 낳았다”고 응수한다. 전형적, 정상적 가족에 대한 기준이 확고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비정상이 되는 동양 사회에서 부모나 자녀 중 하나라도 없거나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가족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동양 사회는 혈연을 중시한다.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부계 혈연 가족 사회인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나타났다. 여성은 오로지 아들을 낳느냐 못 낳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으며 심지어 아들을 못 낳으면 소박을 당하기도 했다. 부계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적자를 낳아주는 것뿐이었다. 여성은 이런 가족 안에서 언제나 아웃사이더일 뿐이었고 그래서 여성들은 아들을 통해 권리를 되찾고자 하였다.
호정 역시 이런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며느리’이다. 그녀는 영작에게 전형적 가부장 사회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은 “신경 끄고 니 인생이나 잘 살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시부모님에게만은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낸다. 영작은 자신의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거나 귀찮은 일이 생기면 꼭 호정이 해주기를 바란다.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아버지 창근을 모셔와야 했을 때 영작이 호정에게 좀 모셔오면 안 되냐고 하자 호정은 “자기 아버지는 각자 알아서 좀 합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다음날 그녀는 시아버지를 모시러 간다. 창근이 병의 악화로 병실에서 피를 토할 때도 영작은 피가 튄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뒤치닥거리는 호정이 다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호정의 친부모에 대해서는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 반면 그녀의 시부모이자 영작의 부모인 창근과 병한의 비중은 꽤 높다.
이처럼 영화의 커다란 줄기는 ‘바람’이 아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부장 사회의 ‘피’의 대물림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런 끈끈한 대물림과 혈연의 문제는 서양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동양, 특히 가부장적 유교 사회의 독특한 특징이다. 영작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는 30대의 건실한 가장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나쁜 피’를 타고난 인물이다. 영작의 할아버지는 6.25 때 6명의 여자 형제들과 아내를 버리고 아버지와 둘이서만 피난을 왔다. 6명의 여자 형제들은 모두 죽었다. 그렇게 가부장제의 핵심인 남자들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 부-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피’는 할아머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의 죄의식과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주’씨 집안의 되물림을 상징한다. 영작은 그를 옭아매는 '가족'의 굴레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이다. 간암 말기 환자인 아버지가 영작의 옷에 ‘더러운 피’를 쏟는 장면은, 영작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아버지의 삶을, 아버지의 '나쁜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자식임을 암시한다. 나쁜 피의 영향은 입양한 아들인 수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수인은 아버지인 영작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 당한다.
<바람난 가족>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또는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해내야 했던 이전 가부장제 한국 사회 속의 가장이 이제 그 모든 역할을 잃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채 징그러운 ‘핏줄’만이 남아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가장은 아직도 가정에 얽혀 있다.
60대인 영작의 어머니 병한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15년만에 섹스를 하고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을 위해 살 거라고 선언한다. 성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고 성 개방이 상당 부분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여성은 왜 자신은 만족스런 성관게를 하지 못하는가를 고민하게 되고 남성은 여성을 만족시켜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야 한다.
병한의 고백은 지금까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자신을 위해 행복하게 살 수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사회는 특히 가족 성원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가족이 중시된다. 가족의 일이 자신의 일이고 가족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영작의 아들 수인을 죽인 사내는 자신의 최대 자랑이 ‘처남’이고, 절박한 사정을 변호사 영작에게 호소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찾아온다. 결국 영작에게 앙심을 품고 수인을 죽이고 나서는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고, 그의 어머니는 영작의 앞에 무릎을 끓고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사죄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기 이전에 ‘가족’이다. 이렇게 가족을 개인보다 중시하는 특성 역시 서구 사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희화화되어 묘사되는 인물은 영작이다. 그는 아내 호정에 대해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고 호정에 비해 자존감도 없다. 때때로 그는 그것을 인정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수인이 죽고 나서 결국 지금까지 쌓였던 것을 호정에게 터뜨린다. 그 때 그는 “니가 뭐가 그렇게 잘났냐”며 호정을 때려 손가락을 부르뜨린다. 그리고 몸이 달아서 찾아간 정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미안하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선다. 마침내 마지막에는 호정이 혼외정사로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잘 해줄게”라며 매달리다가 호정에게 ‘아웃’당한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잃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만큼 가중되는 역할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그렇지만 여성 앞에서는 언제나 큰 소리를 치고 싶어하는 남성의 복합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결론이 과연 가족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탈출구를 찾았다면 그것은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유기적 관계에서 기계적 관계로 변해버린, 껍데기뿐인 가족이라는 제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뿐이다.
Ⅳ. 결론
이 두 영화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현대 산업사회의 도래에 따른 가족의 해체 현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하게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서양은 동양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존중되긴 하나 정도의 차이일 뿐 서양에서도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사회화는 사람들의 가치를 물질 만능주의로 이끌고 가족의 기능을 상당 부분 사회가 대체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어느 한 사람의ㅡ즉 여성의ㅡ 희생에 의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족은 남녀의 평등 실현에 겨우 한 걸음 내딛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미국 가족주의 헐리우드식 영화는 자칫 이런 가족의 해체가 여성의 사회 진출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결국 가장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여성이 희생했던 그 시절이 평화롭고 행복했었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아메리칸 뷰티> 역시 해석하기 따라서는 그런 면이 있고 그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서구 가족에서 맞벌이 부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더욱 더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가고 마침내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해체되어 가는 행태가 드러나고 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원래부터 가족이 각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구속력이 동양에 비해 작다. 서양의 청소년들은 18세만 지나도 집을 나와 독립할 수 있고 대학 등록금은 스스로 버는 것이 당연시된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간섭도 심하지 않다.
반면 동양의 가족에서 두드러진 특성은 지나치게 구속력이 강한 가부장제 가족 형태일 것이다. 동양의 가족 역시 산업화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함께 가장의 권위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고 여성들은 이중 노동의 고통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부장제 전통 자체에 내재해 있는 혈연 관계, 즉 대물림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부계 가족의 특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가족의 틀 안에 꽁꽁 묶어놓는다. 지금까지 동양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족 또는 집단이 존재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산업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로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동양의 가장들은 더 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 없는 ‘남자의 자존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가족은 그 오랜 뿌리에서부터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변해가고 있는 형태는 비슷하다. 가족의 붕괴가 계속되면서 여러가지 대안들과 이론들이 제시되었지만 ‘정답’은 없다.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myth를 깨닫고, 가족의 현실을 미화시킬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가족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